비 오는 날이면, 남궁진은 꼭 한 번씩 그날을 떠올렸다.
흑룡곡에서 설화를 데리고 도망치던 날.

“야, 이거 진짜 맞냐?”
남궁진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.
“뭐가.”
설화는 앞도 안 보고 달리며 대답했다.
“강호 버리고 산속에서 살자고 한 거.”
“싫으면 돌아가.”
“지금 돌아가면 나 죽는다.”
설화가 피식 웃었다.
그 웃음이 이상하게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.
—
그렇게 둘은 산속에 자리 잡았다.
처음 며칠은 정말 ‘낭만’이었다.
맑은 공기, 조용한 숲, 피 냄새 없는 삶.
그리고—
“옷 좀 입어라.”
남궁진은 얼굴을 돌렸다.
설화는 개울가에서 물을 떠오다가 젖은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짜고 있었다.
얇은 옷감이 몸에 달라붙어, 굳이 보지 않으려 해도 다 보였다.
“왜.”
“왜냐고 묻냐…”
“강호에서 수백 명 죽이던 놈이 부끄러움은 있네?”
“그건… 그거고…”
남궁진은 괜히 검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.
설화는 일부러 더 천천히 머리를 털었다.
물방울이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.
“야.”
“응?”
“너 일부러 그러지.”
“뭐가.”
“지금.”
“아닌데?”
딱 봐도 맞는데, 표정은 너무 뻔뻔했다.
—
며칠 뒤.
남궁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.
“우리… 문제 있다.”
“또 왜.”
설화는 나무에 기대 누워 있었다.
“돈이 없다.”
“강호 최강 둘이 돈 걱정하네.”
“진지하다.”
설화는 한숨을 쉬더니 벌떡 일어났다.
“그럼 내려가서 좀 털어올까?”
“안 된다.”
남궁진이 단호하게 말했다.
“이제 그런 거 안 한다.”
“착하게 살겠다?”
“...그래야 너도 살지.”
설화는 잠깐 말을 멈췄다.
그리고 웃었다.
“야, 너 그거 알아?”
“뭐.”
“그렇게 말하면 좀 멋있다.”
“지금 놀리는 거냐.”
“아니.”
설화는 가까이 다가왔다.
“진짜로.”
너무 가까웠다.
숨이 닿을 거리.
“근데—”
“근데?”
“얼굴 빨개진 건 별로 안 멋있다.”
“야!”
—
그날 밤.
둘은 같은 집에서, 다른 쪽에 누워 있었다.
이상하게 잠이 안 왔다.
“야.”
설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.
“왜.”
“너 강호에서 연애해본 적 있냐.”
“…없다.”
“진짜?”
“진짜다.”
설화가 킥킥 웃었다.
“그럼 나도 처음이네.”
“너는… 많을 줄 알았다.”
“죽일 땐 많았지.”
“그건 좀 무섭다.”
“그래서 싫어?”
“아니.”
남궁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.
“너라서 괜찮다.”
조용해졌다.
그리고—
“야.”
“왜 또.”
“이쪽으로 와.”
“왜.”
“그냥 와.”
잠깐 고민하던 남궁진은 결국 일어나서 설화 쪽으로 갔다.
가까이 누웠다.
생각보다 더 가까웠다.
“야, 이거 너무 가까운—”
설화가 손을 뻗었다.
그의 옷깃을 잡았다.
“조용히 해.”
“…”
“심장 소리 들리니까.”
“누구 거.”
“둘 다.”
—
다음 날 아침.
남궁진은 눈을 뜨자마자 굳었다.
설화가 팔을 베고 자고 있었다.
머리카락이 목에 닿았다.
숨결이 느껴졌다.
“야…”
“일어났냐.”
눈도 안 뜨고 말했다.
“이거 언제부터—”
“밤부터.”
“왜 안 치웠냐.”
“편해서.”
“…나 불편하다.”
설화가 눈을 떴다.
그리고 천천히 웃었다.
“거짓말.”
“진짜다.”
“그럼 가.”
손을 놨다.
남궁진은 잠깐 멈췄다.
그리고—
안 갔다.
설화가 다시 웃었다.
“봐라.”
—
강호에서는 여전히 그들을 찾고 있었다.
배신자.
도망자.
살수와 검객.
하지만—
산속의 작은 집에서는
“밥 타!”
“니가 했잖아!”
“불 조절을 못하냐!”
“검은 잘 쓰는데 불은 못 쓴다!”
“야!”
이런 소리가 더 많았다.
그리고 밤이 되면—
“오늘은 떨어져 자.”
“싫어.”
“왜.”
“추워.”
“지금 여름이다.”
“그래도.”
결국 또 붙어 잤다.
—
어느 날.
남궁진이 문득 물었다.
“후회 안 하냐.”
설화는 하늘을 보다가 말했다.
“가끔.”
“뭐가.”
“사람 덜 죽일 걸.”
“…”
“근데 이건 안 후회한다.”
“뭐.”
설화가 그를 봤다.
눈이 묘하게 빛났다.
“너 데리고 튄 거.”
남궁진은 아무 말도 못 했다.
얼굴만 또 빨개졌다.
설화가 웃었다.
“진짜 재밌다 너.”
—
강호는 넓고,
싸움은 끝나지 않았고,
그들을 노리는 자들은 여전히 많았다.
하지만—
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,
검보다 뜨거운 게 있었다.
그리고 그건—
서로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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